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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오기 (2003년 동아마라톤 후기 3)

by Triathlete 2008. 3. 5.

"춘천 마라톤 기록이 어떻게 되요"

"3시간 57분인데요"

"내보다 늦네 난 51분인데..."

"예..."

국군상무부대에서 만난 검정안경쓴 철녀 박의 얘기가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한테는 지면 안된다는 아버지 말씀을 신앙처럼 가지고 있던 내게 그녀가 던진 한마디가 화두처럼 머리속을 헤매고 다녔다. 언젠가 뽄데를 보여줘야지...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서울마라톤(2003년 3월 5일)에서 그녀를 만나게된 것이다. 난 뒤에 있는 그녀를의식하며 힘차게 뛰어 나갔다.15km 자점에서 뒤에 따라 오던 철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끈질기게 날 따라 왔다. 좀 따라 내기 위해 빨리 뛰었다고 안심하면 또 나타나고... 내가 좀 일찍 들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일초의 차이도 없는 3시간 47분 48초로 똑 같았다. 아쉽지만 승부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기록이 없어 동아마라톤에는 아예 등록 조차 못했다. 그러나 운명은 날 그냥 두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배번구했으니 나가자는 회원의 목소리에 아연할 수밖에... 그래 잘됐네 하고 얘기는 했지만 연습도 없이 갑짜기 나갈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 토요일은 보훈병원에서 330m 트랙을 20바퀴 돌고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만명 가까이 되는 인파들 속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을 때 운명처럼 철녀를 만났다. 그녀는 보스톤마라톤 출전 자격을 획득하겠다며 페이스주자까지 두명 대동하고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녀를 이길수 있을까?

"연습도 안하고 갑짜기 나가게 되었다." (나중을 위하여...)

"서울마라톤에서 연습했잖아요"

그렇네 난할말을 잃었다. 아마추어가 연습, 훈련이 따로 있나 시합이 연습이지...

그녀는 두명의페이스를 앞세우고 계속 앞서 달려 나갔다. 거의 1km 를 5분 페이스로 달리는 것 같았다. 난 그 뒤를 따라 붙었다. 10km 지점에서 페이스가 좀 떨어지는 것 처럼 보였고 난 그녀를 추월했다. 달리며 계속 날 곧 앞지를지도 모를철녀의 공포에 시달렸다.

비가 내렸다. 운동화가 젖어 질퍽거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원망스러웠다.곧그치겠지...그러나 끝나고도 계속 내렸다. 25km 까지는 5Km 5분페이스로 계속 달렸다. 항상 느끼지만 25km 부터가 문제다. 고문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유관순,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며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위하며...

30km-35km지점 여기가 제일 고비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나약한 마음을 먹으면기록 단축은 어렵다. 누가 마라톤은 자기하고의 싸움이라고 햇던가? 우린 마음속의 가상의 적과 싸우고 있다. 아버지의 음성이 통증으로 고통스러운 나를혼미하게 만든다.

"여자한테 지면 안돼"

난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봤다. 다행히 철녀는보이지 않았다. 난 달렸다. 보급소가 나오면 물을 마시고 빵이 나오면 빵을 먹고 바나나가 나오면 바나나를 먹으면서 달렸다. 37,38,39,40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들이 하나씩 지나갔다. 이제 2.195km 가 남았다.마라톤이 40km 라면 얼마나 좋을까? 40km 뒤의 짧은구간이 날 피곤하게 만든다. 잠실운동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날부를것 같은 wife의 모습은 보이지않았다. 공식기록은 3시간 40분 00초였다.

내 기록보다 더 궁금한 건 철녀의 기록이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식당에서 그녀의 페이스메이커를 만났다. 3시간 42분이라고 했다. 난 드디어 그녀를 이겼다. "고통속에 희열있다. 고통이 없다면 기쁨도 존재하지 않느다." 올해 10번 풀마라톤 참가 20분 진입이 목표이다.